리비도의 표출 양상 자체를 성격 발달의 주요 지표로 간주한 Freud와 달리 Erikson은 아동의 연령에 따라 리비도의 표출 양상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Freud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Erikson은 변화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환경과 접촉하는 과정에 아동의 자아 양식이 경험하는 위기와 극복 과정을 성격 발달의 주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순기 아동은 빨고자 하는 자아 양식을 갖는데 아동의 주변 환경은 이러한 욕구를 때로 충족시켜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욕구가 충족되는 긍정적 경험과 좌절되는 부정적 경험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자아 양식은 일종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만일 긍정적 경험의 비율이 부정적 경험의 비율보다 높으면 위기는 긍정적으로 극복되며 아동은 긍정적 성격으로 발달하게 되나, 반대의 경우 부정적 성격을 낳게 된다. 이처럼 Erikson 이론에서 성격 발달은 항상 양극적 측면으로 기술된다.
(1) 신뢰감 대 불신감
대개 출생에서 1세 6개월경에 신뢰감 대 불신감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아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아동은 자신과 주변에 대해 신뢰감을 형성하지만, 욕구 좌절로 인한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아동은 근원적인 불신감을 갖게 된다. Erikson에 의하면 이 시기에 형성된 기본적 신뢰감 또는 불신감은 일생을 통해 지속되며, 다음 단계의 성격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일단 형성된 불신감은 변화되기 어려운 비가역적 특성을 갖는다.
(2) 자율성 대 수치감
1세 6개월에서 3세까지의 아동은 신체적 및 생리적 성숙에 의해 최초로 대소변 가리기와 같은 자기 통제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아동의 자기 통제 행동은 이들의 미숙함을 우려하는 부모의 규제를 받게 되거나 또는 스스로 실행해 보는 과정에서 실패에 부딪치게 된다. 이와 같은 성공과 실패의 양극적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아동은 자기 통제에 기본적인 자신감을 갖게 되어 자율성이 형성된다. 과도한 외부의 통제로 인해 위기의 극복에 실패할 때, 아동은 통제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수치와 회의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자율성 대 수치감 간 위기의 극복 양상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자기 통제력의 기초가 된다.
(3) 주도성 대 죄의식
3세~6세 사이에 아동은 주도성 대 죄의식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아동은 자신의 활동을 계획하고 목표를 세우며 이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놀이 장면에서 정글짐을 필사적으로 오르는 행동은 주도성의 표출 형태이다. 또래 집단과 더불어 놀이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주도성에 의한 자기 주장이 나타나고, 경쟁에 몰입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때로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최초로 싹트는 자기 주도적 활동이 적절한 비율로 성공하게 되면 아동은 주도성을 확립하게 되지만, 실패의 경험이 많을 경우 아동의 주도성은 위축되고 자기 주장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된다.
(4) 근면성 대 열등감
Erikson에 의하면 6세에서 11세 사이는 아동기 자아 성장의 결정적인 단계로서 근면성 대 열등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지적 및 사회적 기술을 요구하게 된다. 아동들은 학교에서 부과하는 여러 과제들에 꾸준히 주의를 기울이고 성실히 작업에 임하는 과정에서 근면성을 획득하게 되며, 이러한 근면성에 의해 전 생애에 중요성을 갖는 과업 성실성을 갖게 된다. 이 시기의 아동들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적절한 성취를 느끼지 못하면 열등감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Erikson은 아동을 격려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북돋아주는 교사나 부모의 태도를 중시하고 있다.
Erikson(1902~1994)
Erikson은 1902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덴마크인 아버지와 유태인인 어머니에게서 출생하였다. 그는 출생 전에 부모가 헤어져서 세 살 때까지 모친 슬하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소아과 의사인 Homburger 박사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 Erikson은 어머니와 계부는 유태인이었지만 자신은 북구적인 금발과 푸른 눈을 가졌기 때문에 유태인 친구들로부터 이교도라는 놀림을 받곤 했다. 이러한 경험이 후에 그의 정체성 위기와 혼미에 관한 연구의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rikson은 고등학교 때 고대사와 미술에 뛰어난 두각을 보였지만, 틀에 박힌 학교 분위기를 싫어하였다. 졸업 후 상실감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감에 사로잡힌 Erikson은 대학 진학 대신에 미술 공부를 위해 유럽을 방랑하였다. 25세에 Erikson은 Anna Freud가 설립한 비엔나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Anna Freud의 지도하에 아동 정신분석 수련을 받았다. 이것이 Erikson과 심리학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Erikson은 히틀러의 탄압에 의해 1933년 유럽을 떠나 미국 보스턴으로 가서 그 도시에 최초로 아동 정신분석가로 개업하였다. 동부의 보스턴에서 3년을 보낸 후 서부의 예일 대학에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냈다. 1939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아동 정신분석 치료와 정상 아동을 대상으로 중요한 종단적 연구를 하였다. 또한, 인디언 부족을 연구하기 위해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였다. Erikson은 Freud가 밝혀내지 못한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하는 정상적인 아동들의 삶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1949년, 개인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는 충성 서약서 서명 거절로 캘리포니아 대학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메사추세츠의 오스틴 릭스 센터에서 수석 자문위원으로 1960년까지 일했다. 비록 공식적인 학위는 갖지 않았지만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